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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이스라엘 독립은 하나님의 역사

by 큐브릭스 2020.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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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비유와 하나님의 섭리

 

이스라엘과의 전쟁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개봉 당시 전 세계 비평가, 관객으로부터 '생각하는 인간의 대 서사시'라는 극찬을 받은 대작이다. 광활한 사막의 모래를 수천 톤의 모래 바람보다도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해 강력한 시각적 호소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영화는 성경 고고학자로 출발하여 전쟁 스파이, 작가, 군인, 군사전략가, 영국 수상 처칠의 보좌관까지, 파란만장한 사람을 살아간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 1888-1935)의 이야기다.

 

20세기 초 쇼펜하우어와 같은 인생 철학자들에 의한 무신론이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도 같이 고고학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이들은 말로만 듣던 이집트 왕가의 무덤을 발굴해 3000년 전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는 어딘가 반드시 유적이 있다는 사고를 굳히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성경이라고 해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성경에 기술되어 있는 역사라 하더라도 그 증거가 되는 유적이 없다면 이것을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세계사에 등장하는 나라와 영웅들 그리고 고대 도시들의 형성과정 속에서 선지자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무신론, 과학적 증거와 유적의 삼각 고리 한가운데 로렌스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명으로 그 유적을 찾아 나선다는 것조차 모른 채, 중동으로 떠났다. 그에게는 단 한 가지 영국이라는 고지식한 나라가 싫다는 것이 개인적인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앗수르와 이집트의 전쟁은 성경에서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되, 중동 지역의 세계 역사에서는 그렇다 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 같은 신화적인 기록으로 치부하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은 죽은 신으로 계시지 만은 않으셨다. 살아계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당시의 열풍과도 같았던 고고학을 통해 해결하셨다.

 

2차 세계 대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지리, 지형에 밝은 고고학자들을 스파이로 보내 중동의 정세를 살피게 했던 유럽 사람들을 통해, 바벨론 이집트 전투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로렌스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고고학자였다. 그랬던 그였기에 바로 그가 성경을 사실로 밝히는 하나님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성경이 전설이나 신화 같은 사실 무근의 얘기를 적은 책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적은 책이라는 것을 밝히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들은 몇 년 동안 세계 방송과 신문에서 해외토픽으로 아주 인기가 좋았다.

 

20세기 초 무신론과 실존주의가 유렵을 휩쓸 무렵이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 자체가 세상의 변화를 모르고 시골 어딘가에 박혀 사는 무식한 사람으로 느껴질 그 시대였다. 하나님께서는 울리의 '갈대아 우르(아브라함의 고향) 발굴'. 로렌스의 바벨론의 유적 등 고고학의 신선한 사건들을 통해 '내가 너희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음'을 알리셨다.

 

이처럼 장황한 서론을 펼치는 것은 패망 후 2천 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이사라엘의 독립은 그 자체가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것과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와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랫동안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들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만들었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유엔의 자유 투표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국권회복에 대해서도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기록이 결코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큰 일 행하기 전에 반드시 예언을 통하여 알리고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리고 유대 민족이 이천 년간 나라 없이 세계 각처를 유랑했던 것은 형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결단인 만큼 반드시 그 이유와 시기를 성경에서 찾게 될 것이다.

 

이사라엘의 흥망성쇠의 역사 중에서 이스라엘이 패망했던 역사를 돌아보며 성경은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에스겔이나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방신을 섬긴다던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에 대한 징계의 방법으로 유대 민족의 나라가 패망케 만드신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이 AD 70년경 로마 군에게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처참히 쓰러진 역사적 사실도 하나님의 징계일 것이고, 그 분명한 패망의 원인과 이유를 신, 구약성경 여기저기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패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과 역사적인 성취를 통해 유대인들이 거부한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사야 9장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의 구절이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상황과 그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리고 유대 민족이 그를 따르지 않아 화를 당하게 될 것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

 

이사야 13-14절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를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는 도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의 머리와 꼬리며 종려 가지의 갈대를 꺾으시리니.

 

누가는 13장에서 마가는 12장에서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예수 승천 이후 유대 민족의 앞날을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13장 6-9 한 사람(하나님)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이스라엘 민족)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믿음)를 구하였으나(예수님의 전도)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사도들)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예수님의 전도 기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유대민족의 패망)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되 주인(하나님)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사도들) 두루 파고 거름(전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시니라.

 

단 하루 만에 하나님을 십자가 형으로 죽인 그들의 죄를 단 하루 만에 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전하는 이사야나, 예수 사후 얼마간의 전도 말미를 얻어내는 제자들이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후 얼마간의 전도 말미를 얻어내는 제자들이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은 패망하게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유대 전도는 언제 마감되는가, 그것은 스테반 집사의 순교를 고비로 제자들은 더 이상 유대 전도를 포기하고 이방 전도에 나서게 된다. 고린도, 갈라디아와 같은 지중해 연안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이들의 전도를 행하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수 사후 40년 만에(에스겔 4장 6절) 운명적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이해하고 나면 사람이 엮어 가는 것 같은 세계사의 흐름의 중요 맥락을 하나님이 강하게 잡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유대인들의 패망도 영토 욕심이 많았던 로마를 채찍으로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은 이 사건과 무관하신 듯 뒤로 숨었고, 그들이 다시 국가를 회복하는 금세기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계신 듯했다. 고집 세고, 복수심 강한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상대로 유대인들은 유엔의 자유투표로 그들의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예언적 신호탄이기도 했다.

 

마태복음 24장 32-33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생명의 새로운 시작) 잎사귀를 내면(이스라엘의 국권회복) 여름(마지막 때)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그리스도)가 가까이 곧 문 앞(하나님의 전도)에 이른 줄 알라.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의 생활에서 너무도 친숙한 나무이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 등장했던 나무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여 말하였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4)

 

이 나무에 생명이 돋아날(이스라엘의 국권회복) 즈음, 인자(그리스도)가 문 앞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로 오신 그들의 하나님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므로,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이 다시 나라를 찾게 될 때 그리스도로 다시 오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닌 전 세계인의 구원자로 올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학대를 못 이기고, 유대 지방의 전도를 포기하고 이방 전도를 시작한 것으로 하나님의 의중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 또한 미리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나라를 잃었으며, 세계 도처에서 그들이 지금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다시 국권을 회복했다.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20세기 초반 급격히 힘을 얻기 시작한 시오니즘의 결과가 그들의 현재 나라이며, 이것은 자신들의 끝없는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럽과 세계 도처에서 천덕꾸러기이던 이들에게 힘을 주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은 이들을 너무 싫어하던, 유럽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무화과나무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독립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떤 모습으로 어느 곳에서 어떤 역사를 이루시고 계실까? 단지 들리는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위태롭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소식뿐이다.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대형교회로의 성장만이 훌륭한 목회자의 평가기준이 되고 있는 현대교회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목사님들을 만날 수 있다.

 

십자가 탑이 선 곳이면 어느새 또 다른 모습의 하나님이 탄생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서실 자리는 어디인가? 이것이 금세기 기독교인들이 풀어야 할 최대의 숙제요, 두려움의 근원이다. 만의 일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 모습을 잃은 현대교회의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으시고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계신 것은 아닐까? 평신도들의 소박한 믿음의 고민을 풀어줄 지혜롭고 아름다운 제2의 사도 바울은 영영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제1977호     2002년 5월 6일     THE CHRISTIAN PRESS     특별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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